

솔직히 그리스는 사시사철 이 하늘이긴 하지만,
어느새 2017년 여름이 다가온다.
한국도 오늘 5월 26일 여름으로 접어드는 걸 실감하게끔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맑은 하늘이 떴다.
너도나도 인스타그램에 언제 다시 볼지 모를 맑은 하늘을 찍어 올렸더라.
그리스에 지내는 시간이 더 많다 보니까
아무래도 한국에서 미세먼지나 교통체증에 의해 뿌옇게 가려진 하늘이 익숙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지중해 국가가 지닌 가장 큰 혜택은 아마도 수평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 파란 하늘과 바다가 아닐까.
그리스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다가온 것도 아니고 이미 와서 기다리는 느낌이다.
'아직도 이 햇살을 봄 햇살로 생각하니? 선크림 꼼꼼하게 안 바르면 고생 좀 할 거야.
대신에 해가 잘 드는 오후에 바다 수영을 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해도 상관없어.'
라고 그리스가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직 6월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가벼운 겉 옷이 필수인 마당에,
그리스는 나더러 헐벗고 바다를 즐기라 부추긴다.
뜨거운 해는 그늘 아래 들어가면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을 좋게 한다. 날씨는 아직 살만하게 덥다.
그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바닷가에 죽치고 앉으면 편안하다.
아름다운 지중해 풍경. 파르가(parga)
이미 여름의 풍경이다.
실제로 내가 지중해 국가에서 여름을 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바다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리스는 여름에 체감온도가 42도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더운 국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여름과는 달리 습도가 낮아
뜨거운 햇살을 이겨낼 방도만 잘 찾아내면 비도 잘 안 오고 불쾌지수도 낮다.
그래서 그늘을 찾아 들어가거나 아니면 이렇듯 물을 찾아서
뜨거운 해를 맞으며 비치 라이프를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컨대, 유럽 사람들에게는 바다와 함께 여름을 나는 것이 아마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물론 먼 동쪽에서 왔던 나는 유럽식 바닷가 생활에 어색했다.
남녀노소 이쁜 수영복을 입고 서로의 몸매도 개의치 않으며
허름한 파라솔과 선배드만 있다면 드러누워 스스로를 햇살에 굽는다.
샤워시설이나 화장실과 같은 편의시설이 없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되려 그런 편의시설들이 잘 갖추어진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니까.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해먹은 편할 것입니다.
선배드를 하나 빌려 눕는다. 입고 온 상의를 벗고 오일을 바른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누워 선글라스를 끼고 책을 읽는다. 여기서 책은 수면제 역할을 한다.
어느새 스르르 감긴 눈은 20분쯤 후 뜨거운 햇살에 더워서 등에 땀이 맺힐 즈음에 떠진다.
눈을 뜨고 목이 말라 근처 카페에서 좋아하는 음료를 하나 마신다.
그러고 수영을 한다.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가져간 물안경이 있다면 끼고 에메랄드 빛 바다를 유유자적하며 내려다볼 뿐이다.

파르가의 카페. 마을 기차
시원하다. 옆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지중해 캐치볼을 한다.
던지는 공을 서로 잘 받지 못해 바다에 고꾸라지면 그건 그거대로 해수욕하며 바다를 즐기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랑 나도 저런 놀이나 해봤으면 하고 다시 선배드로 돌아간다.
눕는다.
이내 읽던 책과 함께 잠이 오고 나중에 다시 더워서 눈을 뜨면 수영을 한다.
어느새 나는 그리스인들에게 '너 태국에서 왔니?'라는 말을 들을 지경에 이른다.
인종차별은 아니고 그만큼 내가 까맣게 그을렸다는 거지.
실제로 이번 한국 휴가 때 명동을 걷다가 사와디캅 소리 두어 번 듣기도 했고.

골목으로 향하는 길

사람냄새가 나~
항구도시 파르가의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물론 지중해 바다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마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700년도경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인들이 들어와 꾸며놓은 마을의 구석구석도 아름답다.
수영을 하기 전이라면 그리고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면
사람 냄새나는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골목에 가슴 벅찰 것이다.
관광객이 세상 편한 마을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붙잡고 물건을 파는 호객행위도 없다.
나도 일하러 간 파르가이긴 하지만 일말의 여행기분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래서 기념품이나 이쁜 장신구를 사는 것은 나의 자유이자 관광객들의 자유다.
더러 쉽게 관광지에서 호객행위를 당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무심하게 지나치는 상인들이 어색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놀랜다. 흔하게 볼 수 없는 동양인이 여길 왔기 때문이다.
지나가며 우릴 보고 인사를 하고 중국어를 내뱉는다면
그건 우릴 무시하고 손님으로 데려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닌
단지 보기 힘든 동양인에게 갖는 호기심과 호의일 것이다.
타지인 들에게 상냥한 자국민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 파르가 사람들의 푸근한 인사와 대접은 아마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부담을 덜어주는 요소가,
또한 순간을 추억하기에 가장 간단하지만 힘든 요소가 아닐까.
통통배를 타고

바다는 청록색이지
그리스인들의 꿈의 결혼식장
파르가의 또 하나의 장점은 마을에서 바로 타고 갈 수 있는 요트다.
4~10유로 정도 지불하면 근처에 한적한 고급 리조트 비치에서부터
그리스의 유명 관광 섬들까지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배를 타고 즐길 수 있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 또한 절경이다.
높지 않은 회반죽을 희석해 발라 놓은 듯한 절벽과
중간중간 근대에 교회와 등대로 쓰였던 외딴섬 위 작은 집들을 바라보며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심지어 몇몇 외딴섬의 교회에서는 그리스 정교회식 결혼이 이루어 지기도 한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소금물이 튀어서 새로 산 카메라가 젖을 때까지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러대며 이동했다.
물론 뱃멀미가 심하다면 약이라도 하나 먹고 타는 게 좋긴 하겠지만,
조금만 인내한다면 우리나라 돈으로 왕복 2만 원이 안 되는 배 삯으로 지중해 한 복판을 둥둥 떠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돌고래도 보고 바다 거북이도 볼 수 있다고 하니 하루로는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친구 앤띠모스. 버스 운전 기사
또한 이곳 파르가는 나에겐 추억의 마을이다. 한달 전, 함께 버스를 타고 도착한 앤띠모스는 그리스 사람이다.
바다를 좋아하고 유독 올리브 유와 페타 치즈를 사랑하는 그는 쾌활한 성격으로
버스를 이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함께 식당에 앉았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국어를 배우기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 여자를 만나는 것이라는 걸 알려주었던 앤띠모스.
그는 내 앞에서 독일인과 유창한 대화를 하고
'봤지? 외국 여자도 만나봐. 나처럼.'
하며 내게 거드름을 피웠다.
내심 좋은 충고라고 나도 생각하며 그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더랬다.
그런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버스 운전직을 하면서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농담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실제로 나는 어찌 됐던 독일어를 포함한 4개 국어를 한다.
그렇다 보니 나를 고용한 회사는 나를 좀 더 사무적이고 높은 위치에 고용하려 했었다.
나는 이를 거절했다. 왜? 생각해봐라, 어린 친구.
나는 이 일을 하며 내가 평생에 만나기로 예정되었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도착하는 여행지에서 겪는 경험과 만나는 사람들의 인생,
그곳에서만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고유의 것들이 있다.
회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갇혀 지내는 일을 더 높은 보수를 받고 했다면,
지금의 나 앤띠모스는 이것들과는 별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현재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파르가에 와서 자네와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먹고 운전하는 것이 업의 전부라 배는 좀 나오지만 말이다.
우리가 방문한 파르가는 그리스인들도 동경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짧게 나마 자네와 함께 둘러보아 좋다.
언제 또 이곳을 오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3개월 정도 살아보고 싶은데, 우선 나온 치즈나 먹고 보자 φίλος(친구여)!'
첩-첩- 하며 올리브유를 잔뜩 바른 치즈를 씹으며 나눴던 투박한 이야기다.
문장 단위로 내뱉는 그의 말은 한 문장 한 문장 인생철학을 담고 있어서 다소 복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도 늙은 자신의 마음을 젊고 따듯하게 전달해줬기에
그의 말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런 그도 사랑한 마을 파르가다.
아름다운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