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을 느끼고 위기를 겪다 결국 헤피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진부한 전개라도 곧 잘 보는 편이다.
남녀 간의 섬세한 감정의 교류와 운명적 만남에 대한 동경은 크든 작든 나를 울렁이게 만든다.
그렇다면 나에게 로맨스 영화란?
두 가지 주제가 가장 중요하다.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낭만과 운명이다.
언뜻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 두 가지는 현실에서는 찾기 힘드니까.
영화로나마 대리 만족하는 건 괜찮으니까.
낭만적이라면 호수 같은 잔잔한 진행도 좋다(비포 선라이즈).
운명적 만남이 주제라면 고구마 같이 답답한 전개라도 끙끙 앓으며 볼 수 있다(세렌디피티).
나에게 낭만과 운명은 로맨스 영화에 대한 선택적 필수 요소들이다.
이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영화 볼 맛이 난다.
평론가의 날카로운 평점과 진중한 고찰보다도 저 두 가지 잣대가 나에겐 더 중요하다.
아직 나는 젊음을 살고 있다. 그리고 빈번히 사랑을 생각한다.
불현듯 로맨스 영화 같았던 내 인생 속 운명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운명을 놓치지 않고 잡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젊음을 살고 있을까. 그때의 나는 참 어리고 어리석었는데.
성급하고 편향적이며, 다가오는 기회를 잡지도 놓지도 못하여 애달팠었는데.
지금은 후회하는 애달았던 과거의 순간에 내 옆을 서성이던 신이 있었다.
그토록 내가 좋아하는 운명을 표방하는 신. 혹은 운명 같은 기회의 신.
바로 '카이로스'다.
그리스 신화 속 기회의 신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인간의 나약하고 욕심 많은 마음을 자극하는 시간의 신이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찰나의 기회를 상징한다.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운명의 순간도 카이로스의 것이다.
카이로스 앞에선 모든 것이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렇기에 카이로스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그리스 신화 속 등장하는 절대적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 번복하고 싶은 뼈아픈 이별.
혀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싶은 말 한마디의 잘못.
지금 우리가 후회하는 과거의 몇몇 순간에 카이로스(기회)는 낚아채기 좋은
기다린 앞머리를 내 앞에 흔들었을 것이다. 자길 놓치지 말아 달라며.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카이로스를 스스로 직면하지 않는다면
행복을 쟁취할 순간은 눈에 나타나지 않는다. 듣다 보니 참 치사하고 얄궂은 신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야속하긴 해도 꼭 붙잡고 싶은 운명적 사랑을 인질처럼 붙들고 항상 우리 곁을 맴돌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 순간 늦지 않게 우리를 위한 작은 단서들을 하나 둘 우리 앞에 내비칠 것이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며,
나의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왼손에 저울이 있는 것은 일의 좋고 나쁨을 정확히 판단하라는 것이며,
오른손에 칼이 주어진 것은 칼날로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나의 이름은 '카이로스'다."
카이로스의 우화를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양손에 들고 있는 칼과 저울이 너무 비인간적인가?
밋밋한 뒷머리를 보이며 떠나기 전에 앞머리를 낚아채고 싶은가?
이 오묘한 우화를 읽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카이로스에게 더욱더 열광했다.
자신의 노력과 판단으로 운명과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니.
고대인이 아닌 나도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러할 것이며, 인간이라면 모두가 카이로스를 잡길 원한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는 언제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운명을 소재로 한 영화 <세렌디피티:Serendipity>. 이 영화는 극히 이상적으로 조작된 허구다.
이상하리만치 잘 맞는 대화. 두 남녀의 분위기를 환기시켜주는 적절한 유머와관계를 관통하는 공감대.
다신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껴지는 무언의 이끌림. 새하얀 분위기로 따뜻한 크리스마스 속 배경.
서로 이름도 모르는 남녀가 단 하룻밤을 보내고 쫀쫀한 운명을 느끼는 영화다.
그들이 나눈 짧디 짧은 시간은 그들의 뇌리에 가장 행복하게 기록 된다.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쉬웠던 남자는 여자에게 연락처를 요구하고
여자는 꼬일 대로 꼬인(?) 운명론자였던지라,
'나의 연락처를 적은 책을 내일 헌책방에 팔 테니
그 책이 돌고 돌아 당신의 손에 가는 순간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라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만하고 연락처를 주지 않는다.
남자는 경악을 하고 화낸다. 옳거니 그럼 내 연락처도 알려줄 기회를 달라며 떼를 쓴다.
여자는 순순히 수긍하는 척하며 지폐에 남자의 번호와 이름을 쓰라고 말한다.
그러곤 냅다 지폐를 건네받고 노점상으로 달려가 껌 사 먹는 데 사용해버린다.
남자는 놀라지만, 여자는 떠나간다. 어쩌겠는가. 이미 일어난 일을. 운명을 믿어볼 뿐이었다.
이후, 무려 7년의 시간이 흘러 장면이 전환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피앙새가 생겼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낀다. 7년 전에 봤던 서로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스스로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슬픈 아쉬움이
자꾸만 기억 속 그날 밤으로 그들을 이끈다. 결국 남녀는 서로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윽고 돌고 돌아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데까지 성공한다.
여자는 흔적을 좇아 남자의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남자의 결혼을 막을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결혼하는 모습이라도 봐야
속이 후련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운명을 찾아 무작정 달려간 순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식장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식이 끝난 상태였다.
직원 할아버지만 홀로 남아 텅 빈 식장을 정리 중이다.
여자: 결혼식이 끝난 건가요?
할아버지: 이미 끝났어!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약혼남이 있는 여자가
7년 전 운명을 찾겠다며 무작정 뉴욕까지 날아온 결과가 이거다.
운명의 남자를 포기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그 남자의 번호가 적힌 지폐를 다시 발견한 게 화근이다.
그 지폐를 보지 않았다면 황급히 비행기에서 내려,
텅 빈 결혼식장에 달려가 이런 상실감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진짜 이유는 그를 잡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다.
슬프도록 놓치기 싫었던 의지의 눈물이다. 숭고한 그녀의 마음에 빈정댈 수 없다.
진심은 가장 강력한 욕망이다.
하지만,
운명은 없었다. 기회는 날아간 것이다. 이만 돌아가야한다.
그 순간,
할아버지: 잠깐! 원래 이런 경우에는 준비한 선물을 돌려주니까 걱정 마.
여자: 네?
할아버지: 이렇게 결혼이 '취소'되면 준비한 선물들을 다시 돌려준다는 말이야!

남자도 그랬다. 헤어진 그날 밤 이후로
7년 동안 수많은 헌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여자가 번호를 적어둔 책을 찾아다녔다.
오죽하면 그녀를 찾아 결혼 3일 전 뉴욕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끊었다.
허나, 마찬가지로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약혼녀와 결혼을 결심한 그때 약혼녀가 결혼 선물로 책 하나를 건넸다.
그가 7년 내내 찾아다닌 책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넘기니 그녀의 이름과 번호가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7년 만이다. 그녀의 이름을 알게된 것이. 잊을 수 없는 얼굴로만 떠올랐던. 그녀의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
그녀를 놓친 그를 7년 내내 따라다녔던 후회로 가득찬 단단한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는 결혼을 취소했다. 그리고 운명을 선택했다.

영화는 허구다. 운명과 사랑, 그리고 둘을 합친 운명적 사랑, 이 모든 것이 나에게 허망한 것이다.
그렇지만 왜일까. 영화의 결말은 뻔했고 과정도 조금 답답했을 뿐이지 예측 가능한 전개였다.
심지어 짝이 있었던 두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일방적이냐며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앞서 언급한 진부한 전개가 이런 것일까.
내가 진부한 전개라도 마냥 좋아하는 저급한 취향을 가진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환상적인 운명을 한번쯤은 떠올려 봤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면,
이 기적적인 상황 위에 극적인 운명이 가미되는 것은 지극히 멋진 일이다.
여자와 남자는 운명을 '쟁취'했다.
하룻밤으로 끝날 사건을 끈질기게 따라붙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기회와 이상을 낚아챈 것이다.
남녀의 앞에 있던 신기루와 같은 기회와 이상. 그것이 바로 기회와 운명의 신, 카이로스다.
우리는 일상 속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헌책방에 넘겨진 책과 같은, 혹은
손에서 손으로 무심하게 전해지는 지폐같은 카이로스를 놓쳐왔던 것이다.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의지와 함께 쟁취해야 한다.
운명과 사랑은 별개의 단어가 아니며, 카이로스의 등에 업혀 언제나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표명하는 카이로스적 사랑의 자세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랑의 한 방법이다.